변화에 적응하려면 유행보다 '기본'이 우선
이 글은 ‘Theory Into Practice’ 교육 시스템을 적용한 장기간의 IT 교육을 진행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꾸민 것이다. 처음 교육생들을 모집하기 위한 과정 발표부터 최종 프로젝트를 마치고 수료생을 배출하기까지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IT 교육의 현실과 문제점을 알아보았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 2002년 2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나는 스노우캣이란 이름의 작은 고양이를 좋아한다. 여자 친구의 소개로 지난해부터 알게 된 이 친구는 www.snowcat.co.kr이란 웹 사이트에 등장하는 고양이 캐릭터다. 병이다 싶을 정도로 혼자 뒹굴기를 좋아하는 스노우캣이 공개하는 일기를 매일같이 훔쳐보면서, 나는 무척이나 외로움을 많이 타는 이 고양이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갑자기 스노우캣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한 신문에서 읽었던 기사 내용 때문이다. 그 기사는 20세기가 충직하고 근면함을 상징하는 개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빠른 시대의 변화에 잘 적응하는 약삭빠른 고양이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점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IT 분야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개의 미덕이 가치를 잃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고양이의 적응력이 더해져야 한다는 부담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개발자로서의 소양은 무엇일까? IT 교육기관에 종사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필자가 속한 기관에서 배출된 개발자들이 이러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서 제대로 된 교육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정 발표회 #
필자가 속한 교육기관은 매년 새 과정이 개설될 때마다 과정 발표회란 것을 통해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과정의 취지와 특징 등에 대해 설명해주는 시간을 갖는다. 과정 발표회에는 나름대로의 기대와 의지를 갖고 모여든 많은 학생들로 늘 북적이기 마련이다. 예비 수강생들에게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밤새 준비한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모두 발표하고 나서 Q&A 시간을 가진다. 새로 만든 교육 과정을 처음 소개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다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그 시간을 맞이했다.
그 날 받았던 첫 번째 질문은 “여기는 수강 신청하면 사은품으로 뭘 주나요? 모니터나 PDA 주는 곳도 있던데…“였다.
사실 나름대로 문서걸이나 마우스 패드 같은 것을 나눠줄 것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요구하는 것과 너무 차이가 나서 놀랐다. 우리가 진행하는 교육 과정은 모두 1년 정도의 장기 과정이다. 자신의 짧은 인생 중에서 1년이나 되는 시간을 투자하러 온 사람이 그 1년이 어떠한 시간인지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하는 질문치고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그 뒤에 쏟아진 질문도 우리가 예상했던 질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 과정보다는 작년까지의 결과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여기 수료하면 취업은 잘 되나요?”, “자격증은 몇 개나 딸 수 있어요?” 등….
우리는 과정 발표회에서 학생들과 나눈 많은 대화를 통해, 많은 교육생들이 ‘날개 짓을 하지 않아도 바람을 타고 높이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정을 단지 듣는 것만으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모두 다 좋은 곳에 취직하길 바라는 그들의 기대는 마치 교육을 마술로 착각하는 듯했다.
과대포장 광고의 문제 #
“수료 후 100% 취업 보장”, “XXX 자격증 100% 취득” “이 과정을 들으면 여러분도 IT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XXX 기술을 알면 미래가 보장됩니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여러분을 가르치게 됩니다”
현재 대부분의 IT 교육기관의 모집 광고를 보면 이와 같은 문구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필자가 속한 교육기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 이것도 상당히 다듬은 결과인 걸 알면 놀라는 독자가 많을 것 같다.
물론 모든 광고 문구의 내용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과대포장 광고는 교육생들로 하여금 잘못된 환상에 젖어들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접어둔 채 무작정 교육 기관에 기대게 할 수 있다.
필자는 교육생들이 교육 기관의 광고를 나름대로 잘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취업이라는 단순한 목적보다는 기술을 제대로 배우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한 교육생을 바란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대학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던 시절에도 우리의 선배들은 다양한 컴퓨팅 이론을 제대로 활용하는 기술을 습득해서 지금 IT 산업의 핵심 인력으로 활동하고 있다. IT 전문학원의 교육은 허황된 기대로 가득 찬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다만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 가고자 하는 길을 좀 더 밝게 비춰줄 수 있을 뿐이다.
Theory Into Practice #
현재 IT 교육기관이 수행하고 있는 많은 교과 과정이 기술 열거형 단기 교육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급 기술 습득과 거리가 먼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한 과정이 많다. 이러한 과정은 최소한 몇 년의 실무 경험을 갖춘 재직자에게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초급 수준의 기술을 가진 전공자나 비전공자에게는 채 3~4년을 버텨내기 어려운 소모성 인력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도사리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999년 마침내 우리 팀은 완전히 새로운 교육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 개발을 시작한 당시에는 블루엣 인터내셔널, 플라스틱 소프트웨어, 이스텝 소프트웨어, 아이팁스 등 나름대로 한 가지 소프트웨어 기술을 자랑하는 여러 개의 기업이 한데 어우러져 일을 추진했다. 결국 독립 기업이던 아이팁스는 동명정보기술원의 연구개발팀으로 변했고, 현재 교육 시스템 개발과 운영은 블루엣 인터내셔널과 동명정보기술원이 공동으로 책임지고 있다. 교육 시스템의 이름은 우리의 개발 철학을 살려, ‘Theory Into Practice’라고 정했다.
우리는 응용 기술을 열거식으로 주입하는 교육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론을 직접 가르치지는 못하더라도 이론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기술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교육 과정을 만들고 시행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제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플랫폼 의존적인 기술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도록 키워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키워낸 기술자들이 오랜 기간 바르게 성장하도록 바탕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결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과제였기 때문이다.
자격증의 실체 #
면접을 치르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한 학생이 낸 지원서에 적힌 자격증 기재란에는 MCSE, SCJP, OCP, MCDBA 등 흔히 얘기하는 이 분야의 유명한 자격증이란 자격증은 다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짧긴 하지만 회사에서 실무 경험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학생이었다. 필자는 그 학생이 왜 우리 과정을 신청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저는 이 분야의 비전공자인데 친구들이 권해서 MCSE를 취득했습니다. 처음이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집 근처의 작은 학원을 다녔는데, 꼭 대입학원 다닐 때처럼 문제 풀고 답 듣고 하는 몇 달의 과정을 통해 쉽게 자격증을 딸 수 있었죠. 그 뒤로는 학원비가 부담스러워 후배들과 스터디 그룹을 결성해 각종 자격증에 도전했는데 그 때마다 흔히 ‘족보’라고 불리는 브레인 덤프의 도움을 얻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자격증을 딸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 졸업하자마자 자격증 덕분에 비전공자인데도 쉽게 취직을 할 수 있었는데요, 회사에 가보니 제 실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 결심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이 과정에 등록하게 됐습니다. 사실은 회사에서 일 못한다고 짤렸습니다(웃음)
만일 그 학생이 처음 학원에 갔을 때 누군가 현 업계에서 자격증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소개해 줬더라면 2년이나 지난 이 순간 그 학생이 다시 교육 기관을 찾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빨리 자격증을 취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밤을 새워 족보와 답을 외우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취득한 자격증은 마치 전쟁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집 근처 가게에서 구입해 붙인 훈장과도 같다. 처음에는 그 가짜 훈장 덕분에 사는 것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전쟁터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그 사실이 탄로날 수밖에 없다. 너도나도 돈으로 만든 훈장을 달고 다니면 누가 그 훈장을 보고 존경의 뜻을 표시하겠는가.
유닉스 시스템을 가르치는 이유 #
옛날 한 교수님께서는 컴퓨터가 없어 연습장에 코드를 작성하고, 한참 동안 줄을 서서 천공 카드를 뚫고 나서야 겨우 그 코드를 테스트할 수 있었던 시절의 프로그래밍 환경을 얘기해주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공부한 자기보다 몇 배는 더 좋은 환경에 있는 네가 더 프로그래밍을 못할 수 있냐"며 심하게 야단을 쳤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후배들의 기본 실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시기가 유닉스 시스템이 점점 사라져가고 윈도우 환경이 득세하면서 편리하게 기술을 익힐 수 있게 된 시기와 묘하게도 일치한다.
유닉스 시스템은 단순한 상품 가치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누군가도 그랬듯이 유닉스 시스템은 마치 조립되지 않은 스텔스기 부품들이 비행장에 널려 있는 것과 같은 환경이다. 이 환경에서 무언가를 제대로 작업하자면 사용자 스스로가 자기에게 맞는 환경을 만들어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다. 이런 환경에서 문서를 만들고,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얻게 되는 교육 효과는 무시할 만한 것이 못된다. 가장 큰 부분은 역시 매일 매일 스스로 문제 해결을 통해 작업 환경을 구축해가면서 기술자로서의 기본 소양을 자연스럽게 익혀갈 수 있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닷넷 플랫폼의 소프트웨어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도 유닉스 시스템을 쓰면서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우리가 각 과정에서 쓰는 플랫폼에 상관없이 유닉스 시스템을 기본으로 가르치는 이유다.
프로젝트 교육의 딜레마 #
교육 과정 마지막에는 4개월 이상의 장기 프로젝트 과목이 배정되어 있다. 시스템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개발자간의 기술적인 교류 및 공동 개발 작업 체계를 익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 과제가 됐다.
연구팀은 지난해에 프로젝트를 학생 스스로가 아닌 교육 개발팀에서 통합 관리하는 방식을 취했다. 각 팀들과 일일이 날마다 면담하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며 어느 해보다도 힘들게 프로젝트 과정 교육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학생들의 프로젝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교육은 선생이 아닌 학생이 부지런해져야 성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론과 실제의 불통 #
나는 우리 분야에서 이론과 실제를 떼어놓는 것은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매우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전산분야의 실용적인 작업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막론하고) 무슨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없이 부지런하게만 건설된 것들이기 때문에 위태롭고 어설픈 성과들이 대부분이다. 이론 분야에서 이루어놓은 성과들도 진짜 컴퓨팅 현실로부터 너무나 초연해 있었던 까닭에 현실의 열매를 키워내는 비옥한 토양이 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프로그래밍 연구 그룹’의 주요 목표는 이러한 이론과 실제의 불통이 발생할 수 없는 공부 풍토를 건설하는 것이다.
연구팀은 고급 기술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을까를 놓고 항상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자바의 기본 기술을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좋은 설계란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자’라든가 ‘뻔하게 만들어 보는 예제라도 디자인 패턴이 녹아있게 한다’든지 등….
정보 기술 시장은 유행을 타고 흘러간다(실제 산업에서 쓰는지 안 쓰는지는 아랑곳없다). 언제부턴가 앞서지 않으면 쓰러진다는 강박관념으로 모든 게 앞으로 치닫고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술의 본질 그 자체는 별로 변한 게 없기 때문에, 교육 기관은 언제나 껍질과 본질 사이에서 방황하기 쉽다.
마치며 #
올해 연구팀은 작년 한해 동안 겪었던 여러 가지 실패를 밑천삼아 세부 운영 방안을 추가한 새로운 교육을 다시 한번 시도하고 있다. ‘Theory Into Practice’라는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그동안 이론에 해당하는 교과 과정과 내용에만 신경을 썼지, 새로운 교육 과정에 맞는 완전히 다른 운영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올해의 연구는 운영 기법의 체계를 마련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번에도 어쩌면 지난해와 같이 크고 작은 좌절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올바른 교육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언젠가 이 교육 시스템이 조만간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연구가 결실을 맺어서 우리 정보 기술 수준을 끌어올리는 밑거름이 되리라 믿는다.